주인이 돌아가신 후에도 시부야 역에서 주인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충견 하치공”.
너무나도 유명한 이미담은 일본영화 “하치코 모노가타리” 와 할리우드영화 “HACHI 야쿠소쿠노 이누” 등 많은 도서로도 출판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알고계신가요?
하치공은 여기 오다테에서 태어났답니다.
충견 하치공
충견 하치공은 수컷 아키타견으로 1923 년 11 월, 오다테시오시나이에 있는
사이토기이치 일가, 父:오시나이 산고 母:고마고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도교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농학부교수님 우에노에이사부로 박사가 순계의 일본견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박사의 제자 요마세치요마츠 씨는, 부하・구리타레이조 씨의 지인인 사이토 씨로부터 강아지를 받을 생각을 합니다.1924년 1월14 일, 그렇게 생후 50일 정도의 강아지는 우에노 박사의 품으로 보내졌습니다. 강아지는 박사와 함께 식사를할 만큼 사랑을 받고 "하치"라고 불리게 됬습니다.
이윽고 하치는 멋지게 성장하여 박사를 마중 나가거나 배웅하는 등, 하치와 박사 사이에 강한 유대관계가 형성 되었습니다.
하지만,1925년 5월 21일, 평소처럼 하치의 배웅을 받고 출근한 박사는 대학교 교수회에서 강연 중, 갑작스런 뇌일혈로인해 돌아가십니다. 장례식이 있는 날, 하치는 하룻밤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 상태는 얼마간 계속 됐다고 합니다.
박사가 돌아가신 후, 이사쿠사로 이사를 한 이후에도, 밤에 8 킬로미터 떨어진 시부야 방면으로 달려가는 하치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치의 이러한 행동이 1 년이나 계속되면서, 하치의 삼정을 생각하여 하치와는 낯익은 사이인 식목 장인, 고바야시 키쿠사부로댁에 맡겨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하치는, 저녁을 먹고 나서는 고자야시댁에서 700m~800m 떨어진 우에노댁주변을배회한후, 시부야역개찰구앞에앉습니다.더운날도비가오는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하치는 개찰구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하치는 절대로 사람이나 강아지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지만, 딱 한번 다른 개에게 물려 왼쪽에 있는 귀가 처져 버렸습니다.
이런 하치의 모습이 어느샌가 많은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켜,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 하치를 위해 시부야 역 직원들도 하치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1935 년, 하치는 해외에도 소개되고 영화화되는 등 유명세를 타게 되지만, 필라리아 로인해 3월 5일, 병세가 악화,3월 8일에 하치는 역에서 떠나고 고독하게 11 년의 (인간이면 70~80 세)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치는, 아오야마 묘지에 우에노 박사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충견 하치공연표
1923년 11월 |
오다테시 오시나이 사이토기이치댁에서 父:오시나이고, 母:고마고 사이에서태어났다. |
1924년 1월 14일 |
생후 50 일로 우에노 박사에게 보내지고 "하치" 라는 이름을 받았다. |
1925 년 5 월 21 일 |
박사가 대학의 교수회 강연 중,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돌아가셨다. 이후 10 년 동안시부야 역에서 계속해서 주인을 기다렸다. |
1933 년 11 월 3 일 |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 개최된 개의 전람회(일본견 보존회 주최) 에서 인기를 얻음. |
1934 년 설날 |
"충견 하치공 동상 건설 의향서"가 작성돼, 일본 전국에서 모금이 모였다. |
1934년 4월 21일 |
시부야 역에 동상이 완성. 우에노 박사의 부인 등 각계의 저명인사가 참여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하치공도 제막식에 참가했다. |
1934년 3월 |
초등학교 도덕교육 교과서 제 2 권에 “은혜를 잊지 마라” 라는 제목으로 하치공의이야기가 게재됨. |
1935년 3월 8일 |
필라리아로 사망. 시부야 역 근처에서 발견된다. 도쿄제국 대학 농학부에서 해부, 모피는 박제되고 우에노 과학박물관에서 보관. 아오야마 묘지에서 우에노박사 옆에 매장되었다. |
1935년 7월 8일 |
오다테시 오다테 역 앞에 충견하치공의 동상이 건설되고 제막식이 거행됐다. |
1944 년 |
1941 년부터 시작한 태평양전쟁 때문에 금속류 회수령이 공포, 시부야의 하치공 동상이 공출된다. |
1945 년 |
금속류 회수령으로 인해 오다테에 있는 하치공 동상도 공출된다. |
1948 년 |
하치공 동상 재건위원회가 결성되고 모금으로 하치공 동상이 시부야역 앞에서재건된다. |
1964년 5월 |
오다테 역 앞에 하치공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본떠 "아키타견군상"이 건설된다. |
1987년 11월 14일 |
오다테 역 앞에 하치공 동상이 재건, 제막식이 거행된다. |
오다테시에서 개최되고 있는 충견 하치공에 관한 행사.
하치공 위령제 |
4월 |
오다테 역 앞 |
문의: 충견 하치공 동상 및 아키타견군상 유지회 {TEL 0186-42-2502(아키타견 보존회)} |
하치공 탄생제 |
10월 제2 일요일 |
오다테 역 앞 |
문의: 충견 하치공 동상 및 아키타견군상 유지회 {TEL 0186-42-2502(아키타견 보존회)} |
충견 하치공의 동상
~시부야 역 앞의 동상~
1932 년 10 월 4 일, 도쿄 아사히신문에 "이토시야 로켄 모노가타리" 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것을 시작으로, 신문, 라디오로 보도된 노견 하치에 곁으로 많은 이들의 위문금이 보내져왔습니다. 1932 년 11 월, 일본견 전람회에 초대 받는 등, 하치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그때부터 "하치공" 이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33 년에는 "포치 클럽"(전세계의 애견가조직)의 명예회원으로 추천되어, 1934 년에는 "은혜를 잊지 마라"라는 이름으로 초등학교 도덕교육 교과서 제 2 권에 게재되었습니다.
하치공이 유명해짐에 따라 인근의 주민들로부터 하치공의 동상을 건설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34 년 설날에는 유지들로부터"충견하치공 동상 건설 의향서" 가 작성되어 건설 자금의 모금 운동을 시작, 일본 전국에서 기부가 모였습니다.
이 기부금으로 대좌의 높이 180cm, 하치공 상의 높이 162cm 의 훌륭한 동상이 시부야역 개찰구 앞에 건설되고 1934 년 4 월 21 일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박사의 부인, 각계의 저명인사 등, 약 300명이 참석하고 하치공은 이 모든 것을 요시카와 역장과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합니다.
5월 10일에는 동상 제작자인 구 일본 미술 전시회 심사위원 안도테루 씨가 만든 주조 "충견 하치공의 와상"이 일본 천황, 황후 폐하에게도 바쳐졌습니다. (동일한 물건이 오다테시 출신의 기무라타이지 씨에게도 기증, 2015 년에 그의 유족이 오다테시에 기부했습니다.)
생전에 동상이 만들어지고, 더군다나 그것이 궁중에 바쳐지는 것은 전대미문이였겠죠.
~오다테 역 앞의 동상~
시부야에 충견 하치공 동상이 건설될 소식을 들은 하치의 고향 오다테시에서는, 기무라 타이지 씨를 중심으로 유지 일동이 시부야의 "충견 하치공 동상 " 과 동일한 상을 오다테역 앞에 설치, 하치공이 세상을 떠난 1935년7월8일에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시부야와 마찬가지로 아키타견의 마을의 상징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1945 년 시부야 동상과 마찬가지로 태평양전쟁 때 금속류 회수령으로 인해
철거당해버렸습니다. 많은 시민들에게 사랑받은 동상은 불과 10 년을 채우지 못한 체 사라지게 됩니다.
1947 년 8 월, 시부야역 앞에서는 재건되었지만 오다테역 앞에서의 재건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1964년 5월, 충견 하치공의 젊었을 때의 모습을 본떠 만든 "아키타견군상"이 오다테역 앞에 건설됬습니다.
또 시간이 흘러, 하치공이 세상을 떠난지 50년이 되는 1984년, 오다테시 관광 협회를 중심으로 "충견하치공 동상 재건의 회"가 결성되고 "충견 하치공 동상"의 재건을 위한 모금 활동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1987년 11월 14일, 오다테역 앞에서 하치공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때는 63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박제된 하치공도 참석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제막식이 거행되기 약10개월 전,1987년 2월 3일 부터 5일 까지 일본영화 "하치코 모노가타리" 촬영이 오다테에서 이루어지고 개봉 후 영화를 본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지금은 오다테시 오시나이의 사이토시치로에몬댁 앞에 "충견 하치공 출생지" 라는 석비가 있습니다.
~아키타견 회관 앞의 동상(망향의 하치공 상)~
1945년에 회수된 오다테의 초대 하치공 상이 자리 잡고 있던 대좌는 잠시 동안 아키타견 보존 협회에서 보존되어 주인을 기다리는 상태였습니다. 2004 년 10 월, 주인을 잃은 대좌에 60 년 만에 하치공 상이 완성, "망향의 하치공상"으로 아키타견 회관 앞 광장에 세워졌습니다. 노년의 히치공을 모티브로 한 "망향의 하치공 상"은 마치 돌아온 주인을 맞이하는 듯, 매우 상냥한 느낌이 인상적입니다. 하치공은 사람과 강아지를 향해 이빨을 보이거나 짖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개에게 물려 왼쪽에 있는 귀가 처져버렸기 때문에 "망향의 하치공상"의 귀도 처져 있는 것입니다.
충견 하치공은 아키타견
하치공은 큰 몸과 온화한 성격의 아키타견 이라는 견종.
1630 년대 오다테지방의 영주 사타케 씨가 영지에 있는 무사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투견을 장려하고, 일본에서 옛날부터 사냥에 사용된 개와 "토착견" 등의 혼혈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명지시대, 대정시대(1867 년~1926 년)때는 너무 많은 투견 싸움의 인기로 인하여 투견 금지령이 공포될 정도였습니다.
1927 년 5 월, 당시의 오다테 촌장 이즈미시게이에로인해 "아키타견 보존회"가 설립됬습니다. 이것은 아키타견의 투견화로 인해 잡종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우수한 아키타견을 보존 하기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아키타견 회관에 사진이 전시 되어 있는데, 현재 아키타견과 1930 년대 아키타견은 몹시 모습이 다른것 같습니다.
1931 년 7 월에는 일본 개로써 처음으로 "아키타견(아키타이누)"가 천연기념물으로 지정되고 1934 년경부터 아키타견 보존회가 견적 등록을 실시,
1938 년에는 아키타견 조준도 제정되어 전람회가 개최되기 시작했습니다만 태평양전쟁 때에는 일시 중단했습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보존에 몹시 큰 피해가 있었지만. 애견가들의 노력 덕분에 수십 마리의 순수 혈통에 아키타견이 살아남았습니다. 태평양전쟁 후는 남아있는 순수 혈통을 토대로 급속한 번식을 통해 일본 전국적으로 사육해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977 년에는 아티타견 보존회 창립 50 년을 기념한 "아키타견 회관"이 건설되어, 일본의 견종 단체에서는 유일하게 박물관으로써 평가되고 있습니다.
아키타견의 마을, 오다테
오다테시내에는 "오다테역 앞의 동상" "아키타견 회관 앞의 망향의 하치공상"
밖에도 하치공, 아키타견을 주제로 한 동상과 모뉴먼트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소개해드립니다만, 어쩌면 더 있을 수도?
《 아키타견군상》
{오다테 역 앞 하치공의 동상후방}
《 하치공 생가앞 석상》
{오다테오시나이 사이토댁 앞}
《 하치공 신사》
{오다테 역 1 번플랫폼}
{오다테 역 관광 안내소}
{히가시오다테 역 플랫폼}
{오다테시청 앞 포스트}
{게이조 공원}
{히치공 장원}
{니시 대교}
{니이다 대교}
{산노타이하시}
{산노타이하시 측도}
{오다테 하치만 신사}
{오마치 아카시빌딩}
{맨홀}
오다테시에서 전해지는 아키타견 이야기
데이로쿠와 시로의 이야기 로켄 신사